우리말 이야기(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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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기 나무, 숨비소리
과거 해녀들의 '숨비소리'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 글은 그 연장선이다. 사실 궁금했다. 왜 '숨비소리'인지, 마침 집앞에 '숨비로와'라는 카페도 생겼는데(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숨비는 말이 단순히 입에 감겨서 그런 것은 아닐테고,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찾아본 결과 숨비소리의 '숨비'는 '순비기 나무'에서 온 것이었다. 순비기 나무는 물질하는 해녀들에게 두통 치료제로 오래 쓰였고, 순비기가 '숨비기'가 되면서 '숨비소리'로 이어졌다고 한다. 순비기 나무는 바닷가 자갈밭이나 모래사장에서 자라는데, 만형자 나무라고도 한다. 이명 만형자는 '늦게[蔓]' 가시나무 열매[荊子]를 맺는 특성에서 붙은 이름이다. 딱 지금 7월쯤 해변가에서 연보라색 꽃을 피우고 10월에 열매 맺기..
2021.07.20 -
복숭아
#1 동네에 자주 가는 중국집이 있다. 이름이 '도화원'이다. 짜장면과 탕수육 맛이 깔끔해 자주 찾는다 복숭아 사진을 올려놓고 왜 갑자기 중국집 얘기냐고 물으시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화원'의 '도화'는 복사꽃, 그러니까 복숭아꽃을 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무릉도원'이라 하였고,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길 잃은 어부가 본 신선의 세상에도 복숭아꽃이 가득 피어 있었으니 요리로 선계(신선이 사는 세상)를 보여줄 요량이라면, 퍽 운치 있는 중국집 이름이다. #2 복숭아가 예로부터 장수의 상징이자, 벽사(악귀를 물리침)의 상징으로 널리 통용됐다는 사실도 알아두면 좋겠다. 복숭아나무를 잔뜩 심어 마치 신선이 사는 '선계'의 느낌을 주고 싶기도 했을 테고 복숭아 나무가 악귀를 ..
2021.07.02 -
초당 옥수수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블랙홀과 우주가 아닌 수십만평의 광활한 옥수수밭이었다. 주인공들이 옥수수밭 한가운데를 차로 내달리고, 마지막에는 급기야 불에 활활 타는 옥수수밭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 끝없는 옥수수밭 지평선이 이유 모르게 필자를 매료시켰다. (이 옥수수밭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고, 영화를 찍기 위해 실제로 감독이 캐나다에 조성한 밭이다.) 그리고 인터스텔라 속 2040년의 황폐한 지구에서 옥수수는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식량이다. 나머지 작물은 기후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멸종했기 때문이리라 감독이 쌀이나 밀이 아닌 옥수수밭을 선택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길쭉하게 키 큰 옥수수밭이 황폐함을 묘사하는 데 더 적절할 것이고 또 인류 역사상 수없이 식량 위기가 찾아올 ..
2021.06.24 -
어원이 신박한 '신박하다'
이제는 (사전에는 없지만) 곳곳에서 쓰이는 '신박하다' '신기하고 쌈박하다'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 진짜 어원은 점점 잊혀 가는 듯하다. 과거 블리자드사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하 와우) 게임이 유행하던 시절 와우 게임 커뮤니티 유저들은 '성기사' 캐릭터를 '바퀴벌레처럼 모든 아이템을 독차지하려 들고, '지휘의 문장' 기술로 상대를 잘도 쓰러트린다'는 의미로 '성박휘'라고 줄여 불렀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와우 갤러리'에서 이를 바탕으로, 성기사의 '기사'는 '박휘'로, '기'는 '박'으로 바꿔 부르는 놀이까지 유행했으며 '신기하다'는 '신박하다'로 바꿔 말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면서 '신박하다'라는 말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와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이므로 이 말은..
2021.05.31 -
백신, 타이레놀, 서방정(徐放錠)
2021년 5월 27일 '잔여백신 접종 예약 시스템'이 나오면서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60만명 이상이 백신을 맞는 등 백신 접종 열기가 뜨겁다. 그 가운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백신을 맞고 나서 열이 나거나 쑤시면 어떡할지'에 대한 얘기가 활발히 오갔고 '타이레놀 등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든 진통제를 먹으세요'라는 약사들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 또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 제목에도 나오듯 서방정, 서방형 같은 뜻 모를 단어였다. 그런데 알고 보면 참 뜻이 쉽다, '서방정'은 '서서히 약물이 방출되도록 만든 정제(약)'라는 뜻이고 '서방형' 또한 '서방 작용을 하도록 형태를 갖춘 약'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약사회에 따르면 서방정(서방형) 진통제는 몸속에서 8시간 동안 천천히 ..
2021.05.27 -
쭈꾸미를 쭈꾸미라 부르지 못하고
제철이 조금 지나고, 5월부터 '쭈꾸미' 금어기가 시작됐다지만 언제나 쭈꾸미는 내게 각별한 음식이다 일명 '밥'이 가득한 제철 쭈꾸미를 전골냄비에 끓여 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도 별미고 양념된 쭈꾸미를 불고기와 함께 철판에 볶아 먹다 밥을 쓱쓱 비벼 먹어도 언제나 좋다 매운 걸 잘 못 먹으면서도 일 년에 두서너번은 그 맛을 못 잊으니, 이 정도면 쭈꾸미 애호가라 해도 될는지 너무너무 감명 깊게 읽어서, 필자가 단행본이 나올 때마다 구매한 한 웹툰 작가도 쭈꾸미가 너무 좋아 결혼식 후 친구들과 피로연 자리를 자주 가던 쭈꾸미 집에 마련했단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은 이쯤 되면 궁금해하실 것 같다. 왜 이리 청승맞게 쭈꾸미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이며 줄마다 '쭈꾸미' '쭈꾸미' 하는지 결론부터 쓰자면 쭈꾸미는 현재..
2021.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