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 블루스

2021. 1. 26. 16:00우리말 이야기

자료: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42

 

지금은 아흔을 바라보아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가 아직 허리가 곧던 시절

할머니, 아니 '할매'는 볕이 드는 날이면 뜨락 처마에다 시래기며 우거지를 달아 말렸다.

할매는 아픈 고모 약을 한다며 그 곁에 지네 같은 걸 달아매기도 했으니

지네고 시래기고 어린 마음에는 마찬가지 왠지 못 먹을 듯한 물건인 건 마찬가지였다.

볕에 바짝 마른 시래기에 바람이 불면 사그락사그락 비벼지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렸는데 

그 소리만큼은 가히 '시래기 블루스' 아닌가 내 어린 날의 그 뜨락을 생각나게 한다. 

그 후로도 나는 그 '시래기'를 제법 자주 만났다.

군대 '짬밥'으로 나오는, 된장을 어설프게 풀어넣고 시래기가 녹을 때까지 끓여낸 시래깃국이라든가

퇴사를 앞두고, 선배와 소주병을 놓고 마주 앉은 자리에서 감자탕 냄비 위로 소복이 쌓여 있던 시래기라든가... 하는 것들이다.

시래기는 항상 주인공은 아니었으되, 언제나 그렇게 무심코 내 곁에 있어주었다.

잠시 감상에 젖었는데, 어쨌거나 이 시래기가 무엇이냐면 무청(무의 잎이나 줄기)을 바싹 말린 것이다.

시래기의 사촌으로 우거지도 있는데, 고향에서는 무청 말린 건 시래기, 배춧잎 말린 건 우거지라 했지만

국립국어원 풀이로는 둘 다 시래기이며 딱히 구별은 하지 않고 있다. 

"너 왜 얼굴이 우거지상이야" 할 때 그 우거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누가 '에어컨 시래기(실외기)가 고장 났다'고 어처구니없는 맞춤법 실수를 해서 웃음을 준 적도 있고 말이다.

아, 따끈한 시래깃국이 한 그릇 하고 싶은 나른한 오후다.

오늘 오후도 잘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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