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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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와 수접이
벌겋게 술에 달구어진 아버지 팔월 달아오른 하루 햇볕이 하늘에 붉게 걸리는 동안 술타령이 붉어져 담장을 넘었다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는 파김치보다 더 줄여진 몸집으로 뜨거운 국물에 수제비를 떠 부글거리는 아버지의 술기운을 떨리는 손으로 달랬다 (권순자, 수제비 中) 일찍이 남편이 밖으로만 돌아, 파출부 생활을 하며 어렵게 세 남매를 길러낸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는 "이제 수제비라면 지긋지긋하다"라고 했다. 필자도 배를 곯지는 않았으되, 요즘처럼 '배달의 민족' 따위가 없던 시절 요깃거리로 밀가루 수제비를 하도 먹어 그리 즐기지는 않는 편이다. 그만큼 수제비는 서민 대중의 배를 채우는 요깃거리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고, 누구에게나 수제비에 관한 추억은 하나쯤 있다. 권순자 시인처럼, 아버지가 실직한 날 수제비..
2021.01.20 -
다이내믹 다이너마이트
방탄소년단 'dynamite' 공식 뮤직비디오 지난해 방탄소년단이 신곡 'dynamite'를 발표, 연말까지 각종 차트와 시상식을 휩쓸며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말 그대로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듯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셈인데 '다이너마이트'는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힙합 그룹 다이나믹 듀오 2집 'double dynamite'로도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그만큼 '다이너마이트'는 우리 삶에서 여러 의미로 확장돼 쓰이며, 빼놓을 수 없는 낱말이 되었다. 다만 지금에야 단어 자체가 보통명사가 됐지만, 원래 '다이너마이트'는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폭약의 상표명이었다. 그리스어로 '힘'을 뜻하는 'dynamis'에 명사형 접미사 '-ite'를 붙인 것이다. 자그마한 충격에도 폭발해 인명피해를 일으키던..
2021.01.19 -
막걸리와 대폿집
막걸리로 대표되는 안암골의 그 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대학 때는 유행이었는지, 아니면 뭔가 특별해 보였는지 막걸리를 참 많이도 마셨다. 한 해를 시작할 때, 학과 발대식에서도 막걸리 말통이 등장했고 날씨가 따뜻해져 잔디밭에 뒹굴어도 춥지 않을 때쯤이면 역시나 잔디밭에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분식집 주전부리에 막걸리를 들이켰다. 부끄럽지만 대학 내내 들이켠 막걸리병을 쌓으면 전공책보다 더 높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왜 '막걸리'인지, 어른들은 왜 막걸리 마시러 '대폿집'에 간다고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나이를 좀 더 먹고 이제야 찾아보게 됐다. 막걸리의 어원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막 걸러냈다'고 해서 막걸리다. 사실 기원만 따지면 하급 주류에 속한다. 쌀과 누룩으로 밑술을 담가 청주를 걸러내고..
2021.01.18 -
부추전과 정구지 찌짐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가장 충격받은 음식이 '빈대떡'이었다. '양복 입은 신사'가 '매를 맞는다'는 그 음식인데 처음 광장시장에서 만난 빈대떡은 그 모양새가 상상했던 것과는 영판(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대구가 고향인 나에게 빈대떡은 흡사 기름에 절고 전 두툼한 떡 같은 음식으로 다가왔고 막걸리랑 함께 먹는 것이라는데 처음에는 속이 부대껴 몇 점 주워 먹기 어려웠다. "빈대떡 맛을 모르느냐"고 반문하실 독자분들도 계실 걸로 알지만 그도 그럴 것이 대구에서 이십오륙년을 나고 자라면서 빈대떡은 통 먹은 적이 없고 항상 상에 오르는 것은 '찌짐'이었기 때문이다. 찌짐은 사투리로 '꾸루무리'(끄무레)한 날, 여름비가 '억수로'(굉장히) 쏟아지는 날에 정구지(부추)에 밀가루 물을 넉넉히 두르고, 가장자리가 바..
2021.01.15 -
비키니 수영복 이야기
추우면 더운 게 그립고, 더우면 추운 게 그립다. 날이 워낙 춥고 눈이 내리다 보니 더운 여름이 절로 생각난다. 또 여름 하면 생각나는 것이 비키니 수영복인데 (늘 글에 첨부하는 사진은 덜 자극적인 것을 고르려고 애썼다.) 이 비키니 수영복에는 찬란하고도 슬픈 사연이 묻어 있다. '비키니'의 어원은 핵실험에서 시작된다. 1946년 미국은 남태평양의 비키니(bikini)섬에서 원자폭탄, 수소폭탄 실험을 자주 했는데 동 시기에 최초로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수영복을 만든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드가 수영복의 이름을 고민하다가 '원자폭탄만큼 충격적인 옷'이라는 생각에 '비키니'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수영복 하면 요즘은 스포츠 수영에서 주로 입는 원피스 수영복이 전부였던 시대에 삼각형 천 4장과 끈으로 만든..
2021.01.14 -
벽오동 심은 뜻은...
'장자' '추수 편'에는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중국에서 태평할 때에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의 '오동'을 흔히 보는 '오동나무'(두 번째 사진)로 알고 있는데, 사실 여기서 '오동'은 첫 번째 사진의 벽오동나무를 말한다. 중국 사람들은 봉황이 앉아 쉰다는 이 '벽오동나무'를 '오동나무'로 불렀고, 흔히 아는 오동나무는 '모포동'으로 따로 구별했다. 벽오동의 벽(碧)은 '푸르다'라는 뜻으로 '벽옥' '벽계수' 등에 쓰이는 한자다. 다만 이름이 비슷할 뿐 벽오동나무와 오동나무는 같은 종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카오나무가 벽오동나무의 친척이 된다. 덧붙여 두 번째 사진의 오동나무도 한..
2021.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