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74)
-
밀푀유 나베와 배춧국
어느 해 크리스마스인가 온 가족이 아침부터 배춧잎을 썰고 소고기를 데쳐 '밀푀유 나베'를 만들어 먹은 적이 있다. 배춧잎에 상추에 고기를 겹겹이 쌓아 냄비에 담아 보글보글 끓여먹으니 운치도 있고 한 끼 식사로도 훌륭해 더없이 만족한 기억이 있는데 그때 아버지는 "배춧국과 다를 게 무어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사람마다 생각은 비슷한지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백종원 씨도 "결국 배춧국"이라고 하는 걸 보았다. 뭐 어쨌거나 한국인이면 한 번쯤은 다 해 먹어 보았을 것 같은 이 '밀푀유 나베'는 어디서 온 걸까 '나베'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밀푀유 나베' 자체는 일본에서 만든 음식이다. 원래 밀푀유(Mille-feuille)는 불어로 '천 개의 잎사귀'라는 뜻이며, 상단 사진에도 있듯이 밀가루 반죽을 낙엽처..
2021.01.28 -
돕빠와 겨울바다
생전 아버지는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면 꼭 돕빠 얘기를 꺼내셨다. "겨울이면 돕빠에 오바 하나씩 걸치고 해운대 겨울바다를 가야지" 하는 식이었다. 아버지가 '돕빠'와 '오바'를 구별하는 기준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대충 생각해보면 춥지 않게 걸쳐 입는 두툼한 패딩점퍼 비슷한 것이면 모두 '돕빠'라고 하고 그보다는 조금 얇게, 옷태가 나는 코트 비슷한 것이면 '오바'라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돕빠와 오바는 내게 겨울을 알리는 말 중 하나로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돕빠는 '토퍼'(topper)를 일본식으로 읽은 말이다. 그렇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의 '토퍼' 풀이 '가볍고 조금 헐렁한 여자용 춘추 반코트'와 '돕빠'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원은 같을지언정 한국인에게 '돕빠'는 롱패딩 등..
2021.01.27 -
시래기 블루스
지금은 아흔을 바라보아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가 아직 허리가 곧던 시절 할머니, 아니 '할매'는 볕이 드는 날이면 뜨락 처마에다 시래기며 우거지를 달아 말렸다. 할매는 아픈 고모 약을 한다며 그 곁에 지네 같은 걸 달아매기도 했으니 지네고 시래기고 어린 마음에는 마찬가지 왠지 못 먹을 듯한 물건인 건 마찬가지였다. 볕에 바짝 마른 시래기에 바람이 불면 사그락사그락 비벼지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렸는데 그 소리만큼은 가히 '시래기 블루스' 아닌가 내 어린 날의 그 뜨락을 생각나게 한다. 그 후로도 나는 그 '시래기'를 제법 자주 만났다. 군대 '짬밥'으로 나오는, 된장을 어설프게 풀어넣고 시래기가 녹을 때까지 끓여낸 시래깃국이라든가 퇴사를 앞두고, 선배와 소주병을 놓고 마주 앉은 자리에서 감자탕 냄비 위로..
2021.01.26 -
겨울 스포츠의 꽃 '배구'
해외에서 줄곧 뛰던 김연경 선수까지 국내로 복귀하면서 배구 열기가 뜨겁다 특히 여자 배구는 그 인기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데, 유튜브든 텔레비전 예능이든 여자 배구 선수를 다룬 꼭지도 인기 만점이다. 남녀 공히 배구협회가 선수들에게 팬서비스를 강조하고 교육한 것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배구 팬들은 코로나에도 선수들과 부쩍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훈련 모습 등 '볼거리'가 '매일' 나오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한국에서 '겨울' 하면 "배구 보러 가야지!" 자연스레 말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배구(排球)'의 어원은 무엇일까 영어로는 'volley ball'인데 'volle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바로 맞받아치기'로 풀이한다. 따라서 한자로 번..
2021.01.25 -
해녀, 잠녀, 숨비소리
올레길을 따라 제주 해안을 걷다 보면 저 멀리 물질하는 해녀들이 보이고 호이~~ 호이~~ 하는 '숨비소리'가 들린다. 해녀들이 1~2분간 바닷속에서 자맥질을 하다 물 위로 나와 숨을 고를 때 나는 소리다. 과학적으로는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과정인데 이때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정말 죽을 수도 있어, 혹자는 '생과 사를 가르는 소리'라고도 한다. 제주도와 해녀가 유명해지면서 전국 곳곳에 '숨비소리' 이름을 단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농사일에, 육아에 치이고 물질하느라 잠수병과 이명을 달고 사는 해녀들의 고된 삶을 생각하면 마냥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 있는 단어는 아닌 듯싶다, 어감과 달리 무척이나 고됨이 묻어나는 말이다. 또 해녀들이 물질할 때 부력 기구로 쓰는 둥근 물체는 '테왁'이라..
2021.01.22 -
짬뽕과 짬밥
군대에서 '눈물 젖은 짬밥'을 먹은 얘기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사하는 날이면 새로 이사 든 집에 짐을 대충 부려놓고 "나는 짬뽕" "나는 짜장면" 하며 신문지를 깔고 앉아 젓가락을 비비던 기억도 하나쯤은 갖고 있다. 음식에 대한 추억이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으레 "어른은 짬뽕, 어린이는 짜장면" 하는 식이었는데 독자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각설하고 짬뽕과 짬빱 얘기를 하다 보니 이 '짬'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수많은 유래가 쏟아지는데 그중 하나에 유독 마음이 간다. 일본어 대사전의 '참팽(搀烹)'에서 '챤폰', '챤폰'에서 '짬뽕'이 되었다는 주장인데, '참팽'은 '섞어서 조리하다'라는 뜻이며, 중일전쟁으로 인해 본국과의 교류가..
2021.01.21